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라질 흑인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이는 16세기 때부터 [[포르투갈인]]들이 원주민의 노동력만으로 감당하기 힘든 [[플랜테이션|대농장]]의 운영을 위해 가까운 [[서아프리카]] 해안지대에서 [[노예무역|노예를 수입한 것]]이 시초이며, 17세기에는 브라질 남동부 내륙에 금광이 발견되면서 노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내륙에도 유입됐다. 아프리카에서 브라질로 이주당한 노예들은 크게 서아프리카 출신과 [[중앙아프리카]] 출신으로 나뉘었다. 서아프리카 출신들은 대부분 오늘날 [[나이지리아]]와 [[베냉]] 일대의 [[요루바]]족이 많았는데, 주로 [[다호메이 왕국]]에서 이웃한 오요 왕국을 공격해서 잡아온 노예들이었다. 중앙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주로 오늘날의 [[앙골라]], [[콩고]] 일대에서 잡혀온 [[반투어군]] 부족 노예들이 중심이 되었다. 브라질의 노예제는 [[미국]]보다도 훨씬 가혹했다. 미국에서는 소규모 농장에서 노예를 부렸기 때문에 종종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으나, 브라질의 대농장에서는 농장주가 관리하는 노예의 규모가 훨씬 더 컸다. 미국에서는 먹다 남은 밥을 주던 것과 달리 브라질에서는 아예 밥을 한두가지만 줘서 중노동과 영양불균형 때문에 브라질에 도착한 후 대개 7~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. 과거에는 오늘날과 같은 영양학 상식이 부족했고, 소나 돼지한테 사료를 주듯이 사람에게 밥을 계속 한두가지만 넉넉하지도 못하게 주는데 빨리 죽는게 당연했다.[* 비타민이 발견된 것은 엄연히 현대의 일이고 물론 대항해시대 선원들이 [[괴혈병]]으로 죽어나간다던가 18~19세기에는 유럽에서도 비타민 B3 결핍으로 펠라그라병에 시달리는 인구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별로 특이한 경우는 아니었다.] 브라질에 유입되는 흑인과 백인은 모두 남초였지만 흑인 남성의 경우 가혹한 환경으로 인해 수명이 훨씬 더 짧았고, 이러한 연유로 [[포르투갈계 브라질인]] 상당수는 흑인 노예 여성과의 사이에서 [[혼혈]] 아이를 보았다. 브라질 흑인들은 노예뿐만 아니라 청지기, 보모, 가정부, 처첩, 정부 및 [[첫 경험]] 상대 등으로 백인들과 부대끼면서 살았기에 브라질 흑인들은 대개 상당수의 백인 혈통이 흐른다. 브라질 흑인들의 유전자 중 모계는 85%가 흑인이지만 부계는 대략 50%는 백인에서 왔다고 한다. 일부 요루바족들은 [[무슬림]]이었고 종종 [[하우사족]]이나 [[풀라족]] 출신 무슬림들이 노예로 끌려올 때도 있었는데, 이들은 노예 대우에 맞서 봉기할 때도 있었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상당수가 마름 같은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았다. 19세기 이전 브라질에서는 [[포르투갈계 브라질인]] 대다수가 [[문맹]]이었고, 농장주들 중에서도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. 물론 풀라족이나 하우사족 흑인들은 포르투갈어 [[라틴 문자]]가 아니라 [[아랍 문자]]를 배워온 사람들이었지만, 글을 읽고 쓴다는게 뭔지 아예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다른 언어로 글을 읽고 쓰던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게 더 빨랐다. 브라질에서는 무슬림 출신 노예들을 말레(Malê)라고 불렀는데, 1835년 [[라마단]] 기간에 약 600여 명의 흑인 무슬림들이 브라질 [[바이아주|바이아]]에서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된 사건도 있었다. 16~17세기동안 51만여 명의 흑인 노예가 유입되었으며, 1701년부터 1760년 사이에는 958,000여 명, 1761년부터 1829년에는 172만여 명, 1830년부터 1855년까지는 618,000여 명이 서아프리카 등에서 노예로 유입되었다. 후에 [[브라질 제국]]의 2대 [[황제]] [[페드루 2세(브라질)|페드루 2세]]에 의해 노예제가 폐지되었고, 노예였던 흑인들은 그때서야 모두 해방된다. 페드루 2세는 노예제를 폐지한지 1년 만에 노예제 폐지에 불만을 품은 농장주들에게 매수된 군인들의 [[쿠데타]]로 폐위되어 [[브라질 제1공화국|공화국]]이 수립되었으나, 쿠데타를 주도한 군인들이 신헌법 제정을 놓고 지들끼리 권력 투쟁을 벌이느라 바빠서 쿠데타의 목표였던 노예제 부활은 흐지부지되었다. 브라질 식민지의 본국인 [[포르투갈]]이 워낙에 인구가 부족했던데다가, 15세기부터 서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주도했던 나라이다보니, 결과적으로 당시 브라질의 흑인 인구비율은 [[백인]]의 몇 배를 넘었으며 특히 1835년 브라질 인구조사에 의하면 흑인이 브라질 인구의 51%를 차지해서 절반을 넘었다. 다만 이 흑인인구 증가는 주로 노예무역에 의한것이었고, 윗문단에 적혀있듯이 혹독한 착취로 인해 후손도 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던데다가, 백인 농장주와의 통혼으로 흑인들의 자체 인구증가율이 낮았으며, 브라질 독립 후에 비 포르투갈인 백인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고 1850년에 흑인노예의 수입이 금지되자 흑인들의 인구비율은 빠르게 줄게 된다. 처음 개발된 브라질 북동부를 중심으로 몰려있는데, 이 지역은 [[정글]]을 무리하게 개간하여 토양의 표토층이 유실되고[* 밀림 지대는 강우량이 높은 만큼 토양의 영양분이 씻겨내려가는 경우가 많아 척박한 편인데, 이 상태에서 숲이 파괴되고 토양이 그대로 폭우에 노출되는 경우 그나마 빈약한 표토층마저 쓸려내려가고, 새로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 과정에 반복되면서 토양이 더 척박해진다. 밀림이 우거져있던 지역에 숲이 대규모로 벌채되면 해당 지역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강우량이 감소하고, 극단적인 경우로는 종종 밀림이었던 지역이 개간한 지 몇 년 안가 사막화되는 경우마저 생긴다.] 계속되는 [[사탕수수]] [[플랜테이션]] 농업으로 토질이 악화되는 바람에[* 사탕수수는 [[옥수수]], [[인삼]], [[담배(식물)|담배]] 등과 함께 지력 소모가 엄청난 식물이다.] 19세기 이후로는 브라질 내에서 가장 척박하고 빈곤한 지역으로 전락했다. 설상가상으로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포르투갈, [[이탈리아]], [[스페인]], [[레반트]], [[독일]] 등지로부터 [[유럽]] 및 [[중동]]계 백인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오고[* 이들을 주로 [[상파울루]], [[리우데자네이루]] 같은 남동부 지역이나 남부 지역으로 이민왔다.], 1877~78년에는 동북부에 대기근이 발생하였음에도 브라질 정부에서 별다른 구호 조치를 취하지 않아 40~50만여 명에 달하는 흑인 인구가 아사하기도 했고, 흑인 노예 해방으로 흑인들의 인구증가율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이 당시에는 백인들도 자식 다섯 정도는 기본적으로 낳을 정도로 브라질 전반의 출산율이 한창 높았던 시기였고, 브라질 정부에서 흑인여성들에게 미혼 백인남자와 통혼을 적극적으로 권하여 흑인의 인구비중은 10% 아래로 고정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